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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파도 - 니가 척주에 있어서 좋아. 니가 있는 척주가 좋아. "니가 척주에 있어서 좋아. 니가 있는 척주가 좋아." (313쪽) 소설은 노인의 독극물 중독으로 인한 사망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노인의 이름은 이영관이었으며, 그는 척주 보건소에서 일하고 있는 송인화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18년 전, 동진 시멘트 척주공장에서 근무하던 차장 한명이 어리항 부두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여러 의혹이 있었으나 끝끝내 자살로 결론지어진 그에게는 부인과 고등학생 딸이 하나 있었다. 두 사람은 척주를 떠나 타지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지금 차장의 딸은 약무직 공무원 신분으로 척주보건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그녀가 척주보건소에서 하는 업무는 ‘방문 복약 상담’이었다. 노인들의 집을 방문하여 혈압을 재고 복용하는 약 중에 판매금지 품목이 있는지 확인하고 소지하고 ..
박연준, 여름의 끝 오래된 시간 앞에서 새로 돋아난 시간이 움츠린다 머리에 조그만 뿔이 두 개 돋아나고 자꾸 만지작거린다 결국 도깨비가 되었구나, 내 사랑 신발이 없어지고 발바닥이 조금 단단해졌다 일렁이는 거울을 삼킬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수천 조각으로 너울거리는 거울 속에 엉덩이를 비추어 보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두 손으로 만든 손우물 위에 흐르는 당신을 올려놓는 일 쏟아져도, 쏟아져도 자꾸 올려놓는 일 배 뒤집혀 죽어 있는 풀벌레들, 촘촘히 늘어선 참한 죽음이 여름의 끝이었다고 징- 징- 징- 파닥이는 종소리
박연준, 가느다랗게 붉은 계단에 앉아 문득 무릎에 엉겨붙은 이름을 만져본다 가볍게 흔들리며 허공에 분사(噴射) 되는 기억 상처의 괄약근이 뚝, 풀어진다 아슴푸레 엎드린 이름 하나 피딱지처럼 가렵다 참빗으로 허공을 빗을까 아니지, 저건 뭘까? 무심히 사라지는 빛들의 사체 매캐한 저녁이 삽시간에 누워 어둠이 수평으로 번지기 전에 미처 사라지지 못한 저 소란한 붉음 빛은 사라지기 전 가장 붉은가 계단에 앉아 어두워지는 무릎을 불러본다
박연준, 산책 - 에락 사티의 4분음표 걸음으로 검은 상자야 부유하는 사랑을 어떻게 차곡차곡 쌓을까? 맹목적으로 권총을 쥐고 싶어 아무리 마셔도 줄어들지 않는 물 항아리 속에서 내 몸이 탱탱 불어, 이제 막 터지려 하는데 햇빛은 수줍은 올챙이처럼 떼 지어 도망 다닌다 840번을 반복해도 나는 변하지 않을 테지만 잠을 토닥이느라 눈이 많이 내린다 29년째 얼굴을 찡그리느라 근육을 혹사시켰어 음악은 쉬고 싶을 거야 새벽 4시는 숨죽인 꽃처럼 아름다울까? 이 순간 지나가는 귀신이 나를 본다 지구의 눈썹은 저렇게 파란데 딱딱한 웃음소리가 발등을 휘감아 구두는 잠이 들겠지
박연준, 예감 거짓말하고 싶다 내 눈은 늘 젖어 있고 나는 개 눈을 이해할 수 있다고 캄캄한 새벽 짖어대는 개들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금붕어처럼 세상을 배회하고 있다고 사랑했고 아직도 사랑한다고 벽에 이마을 대고 말하고 싶다 발밑에서 부드러운 뿌리가 썩고 있다 축축한 냄새를 피우며 나는 흙 속에 잠겨 썩은 뿌리를 관찰하는 조그만한 딱정벌레, 이제 곧 한 세계가 질 것을 예감한 높이 1센티미터 슬픔
박연준, 푸른 멍이 흰 잠이 되기까지 날이 무디어진 칼 등이 굽은 파초라고 생각한다 지나갔다 무언가 거대한, 파도가 지나갔나? 솜털 하나하나 흰 숲이 되었다 문장을 끝내면 마침표를 찍고 싶은 욕구처럼 생각의 끝엔 항상 당신이 찍힌다 나는 그냥 태연하고, 태연한 척도 한다 살과 살이 분리되어 딴 길 가는 시간 우리는 플라나리아처럼 이별한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매 순간 흰 숲이 피어난다
박연준, 기억은 청동빛으로 굳는다 거울 속에서 너는 내 얼굴을 침범하고 네 눈으로 나를 본다 너는 권태, 라고 말한다 코끝으로 너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코끝이나 무딘 이마 중앙으로 표현한다 거울 속엔 내 모습이 비치지만 그곳에서 나를 바라보며 도리질 치는 건 너다 그런데 나는 왜 내 눈 속에서 날 바라보는 네 눈을 봐야 하는 걸까? 거울, 거울 속에서 너는 몸이 아니라 시간으로 나타난다 너는 악보의 끝세로줄처럼 서 있다 너는 한쪽 팔이 잘렸고 그것은 유래 깊은 사건 때문이었다 그곳에 바다는 없었지만 너는 바닷물에 화상을 입었고 내가 불탔고, 기억은 팔이 세 개가 되었다 거울 밖에서 돋아난 겨울 속엔 지렁이 세 마리가 산다 움직이지 않는 채로 자란다 거울 속에서 나를 뒤집어쓴 나는 끊어지는 허밍으로 존재하고 우리는 밤의 치마를 돋친 벌을 ..
박연준, 소혹성 B612호에 혼자 남은 꽃 바람이 유난하다 나는 어제 파랬고 오늘은 노랗고 내일 나는 아플 것이다 날아다니는 의자들은 너무 가볍고 그의 엉덩이가 사라진 이 별은 너무 무겁다 마보유리보우 미노루미래쿠 마보유리보우 미노루미래쿠 떠도는 주황색 금붕어들이 부르는 내 이름은 허공에서 뚱뚱해지다 음표가 된다 나는 그걸 음악이라고 생각하기 싫다 화산이 절대로 폭발하지 않는 것은 의기소침해진 비밀 모터가 기억을 잃었기 때문 청소부의 노란 빗자루 없이 활화산은 그저 시무룩할 뿐 내가 거울을 보고 싶어해서 유리 항아리에 밀봉되고 싶어해서 의자들은 공포에 떨었고 결국 내 곁엔 백수물여덟 번의 일렁임만 남았다 나는 오늘 까맣고 어제 붉었고 내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웃지 않은 채로 기뻐하리라 웃으면서 하품하리라 나는 이 작은 별에서 번식하는 바이러스가 ..